빽빽하게 솟은 나무 위로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눈발은 잠시 멈췄으나 공기는 여전히 시리게 차가웠다. 뽀득, 뽀득, 뽀득,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깨끗하고 고요한 눈 위로 우묵한 발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등 뒤로 조그만 오두막이 멀어졌다. 집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로도 한참을 가자, 숲 깊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낮에...
어느새 잘 시간이 되었다. 테오는 화덕을 부지깽이로 뒤적여 불을 키운 다음, 유라테가 쓰는 담요를 그 옆으로 가지고 왔다. 유라테는 모피를 두르고 근처의 의자에 앉아 테오가 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화덕에서 일렁이는 불빛이 청년의 옆얼굴을 비췄다. 새삼, 테오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혼자서 약초나 매만지고 있는 젊은 남자...
“테오! 밖에 눈이 오고 있어.” 덧창을 연 유라테가 반색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우거진 수목 위로 드리운 하늘이 하얗게 변해 그만큼 흰 눈을 펑펑 뿌리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 없이 벌거벗은 먹빛 나무들에 순백의 서리꽃이 내렸다. 파르랄 정도로 창백한 세상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와. 감기 걸릴라.” “잔소리 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라테는 순순...
그녀는 아팠다. 팔다리는 끊어질 듯 쑤셨고 손발은 차가웠다. 비몽사몽 중에서도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어느 한 군데 성한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곳은 가슴이었다. 이 통증이 물리적인 상처로 인한 것인지, 혹은 쓰라린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유라테는 알 수 없었다. ‘너는 내 딸이다.’ 아버지의 음성이 두개골 안에서 울렸...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것은 브로니우스였다. 대공이 나가자, 더이상 볼 일이 없어진 좌중 또한 하나 둘씩 알현실에서 나왔다. 알비나와 유라테는 손을 꼭 잡고 함께 대공비의 처소로 돌아갔다. 잉그리다와 얀도,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두 사람을 따라갔다. 아마 오늘 밤은 늦도록 자지 않고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리라. 유라테가 원래의 지위를 되찾았음을 축...
끼이익-. 미늘창을 들고 서 있던 위병들이 문을 열었다. 문지방 너머로 소녀의 인영이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알현실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대공녀는 평소보다 초라한 옷차림에 해쓱한 낯을 했다. 그럼에도 친어머니의 미모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던 명성은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큰 방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잠시 머뭇대던 그녀는, 곧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우아...
‘전 대공비 안카는 휘하 기사와 간통했다. 안카의 딸 유라테는 대공의 친자가 아니라 그 기사의 자식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발이 없으니 속도는 더더욱 빠르고, 형체가 없으니 잡아챌 수조차 없다. 이틀. 유라테가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수군거림이 그 거대한 성 안에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이틀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나라의 절반이 대공가에서 ...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참석자 중 과반은 유라테의 편을 들었고, 일부는 그녀가 사생아가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유라테에게 상처를 입히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생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해도 면전에서 친어머니의 불륜 여부가 파헤쳐지는데 유쾌할 리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진짜 혈통과 신분이 걸려 있는 문제라면...
유라테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하지만 가끔씩 모친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고 느꼈다. 유라테가 뭐라 말하건 간에 동생에 대한 알비나 대공비의 신뢰와 우애는 굳건했다. 때문에 대공녀는 비클라우 백작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느낌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저 인간의 얼굴을 마주봐야 하다니.’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대공비 또한 회의...
해당 작품은 네이버 시리즈 챌린지리그와 조아라에서도 연재 중입니다. 단, 시리즈/조아라와 달리 포스타입에서는 일부 회차가 성인 관람가로 제공될 예정입니다. 쏟아지는 비는 차디찼고, 나무가 우거진 숲속이라고 더 따뜻하지는 않았다. 거세게 내리는 가을비가 세상을 온통 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흙을 적시는 것이 꼭 물이라는 법은 없다. 서서히 번지는 피 웅덩이...
제가 이런 글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줏빛은 황제의 색이 출간 계약을 맺었습니다. 솔직히 극극초반부만 쓰고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라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출판사에서 받아주셨어요.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따라서 포스타입에 올린 글은 7월 31일자로 모두 삭제할 예정입니다. 조아라, 딜리헙 등 다른 ...
대공황녀 백합 마무리 해야 하는데 또 다른 단편 쓰는 패기(...) 그래도 조만간 완결내서 수정하겠습니다. 단편 시리즈는 비정기적 연재니 봐주세요ㅠㅠ 어느 제국이 있었다. 제국은 밖으로는 강대하고, 안으로는 문화가 융성한 나라였다. 당대의 황제와 국서는 퍽 유능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황제 부부에게 자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